2015년 1월 23일 금요일

병신도(病信徒)를 깨운다 ②

목사에 의존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하여튼 병신도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스스로 독립적인 신앙 인격이 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목사에 의존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라고 정의해도 큰 오류가 없습니다. 아니 그 보다 더 좋은 표현은, 목사를 열심히 따르는 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착각하는 답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병신도들에게는 몇가지 비슷한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는 유형 교회 그 자체 를 매우 신성시합니다. 따라서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거나, 목사를 '주의 사자'처럼 믿고 높게 대접하며 맹종합니다. 당연히 교회의 모든 행사나 프로그램에 무비판적으로 적극 참여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합니다.

둘째로, 십일조나 기타 헌금을 철저하고 성실하게 잘합니다. 남들이 적게 내면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셋째로, 일반적으로 성격이 착실하며, 자신들이 다른 교회 교인들보다 매우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누가 자신들의 교회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정색을 하고 변호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목사 수준에 걸맞게 세속적인 복과 성취를 매우 중요시하며 그것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더 있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아쉬운 대로 병신도 명단에 준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는 기본 자격은 충분히 됩니다.

그런데 이 분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목사의 제자'로 길들여진다는 점입니다. 목사에게 배운 내용대로 따라 하는 것은 잘하는데 자기 스스로 독립적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고민하고, 판단해서, 실천하는 성숙한 신앙인격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이 분들 대다수는 성경 지식이 적지 않으나 심한 편식으로 인하여 영양 불균형 상태의 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경을 배워도 헌신과 헌금을 통하여 복받고 잘된다는 부분을 주로 배우고 또한 그 깊이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 전체에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하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다보니, 이 병신도와 먹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교회들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 아 닐 수 없습니다. 먹사들은 갖은 명분과 핑계를 만들어 욕심을 채우고, 신도들은 이를 아주 좋게 여기며 따라가는 그야말로 속 터지는 일들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즉 먹사는 병신도들을 양산하고, 그런 병신도들은 먹사의 악행을 지원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병든 교회들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평신도를 깨운다!'고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제자훈련도 하고 바쁘게 보냈는데, 요즘은 깨울 평신도들마저도 별로 없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허전한 생각마저 듭니다. 다 스스로 제법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병신도들이 주변에 널렸기 때 문입니다. 그래도 예전의 평신도들은 순박했던 편입니다. 요즘의 병신도들은 스스로 독실한 신앙인인데다가 설탕만 주로 먹고 자라서 단소리가 아니면 잘 듣지를 않습니다. 어쩌다 쓴소리를 좀 하면, 대부분은 성경까지 잘 인용하시며 오히려 매우 거친 반격을 거침없이 되돌려 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여튼 과거에는 조용히 자던 평신도를 깨우는 것이 큰 일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몽유 병에 취한 듯 스스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병신도를 깨워야만 하는 암담한 기분마저 듭니다. 물론 이는 훨씬 더 어렵고 힘드는 일입니다. 요즘의 병신도들은 매우 완고한 데다 스스로 똑똑하며 나름대로 정연한 논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영화에서 깊은 매트릭스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루터와 칼뱅이 그랬듯이

여기까지 병신도의 형성 과정과 문제점들을 간략히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제 한국교회 는 과거와는 또 다른 새로운 분기점에 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의 순박했던 평신도를 깨워야 하는 시대는 점차 지나가고, 앞으로는 고도의 매트릭스에 빠진 완고한 병신도를 깨워야 하는 더욱 어려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 문제는 마치 뜨거운 감자처럼 다루기 쉽지 않습니다. 만일 자신의 교회나 이웃 교회에 가서, "당신들 성경을 제대로 읽고, 좀 똑바로 하시오!" 라고 소리친다면, 입구에서부터 쫓겨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사도 베드로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몸으로 때워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누가 방법론을 좀 시원하게 말해보라면 정말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원칙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 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평신도들은 지금보다 더 무지하고 완고하였습니다. 중세 천년 이상을 어두운 매트릭스에 갇혀 살아왔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따라서 과거 루터와 칼뱅이 그랬듯이,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을 겸허하게 따르며 부지런히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방법입니다. 우리 자신부터 삼허의 헛된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좁은 길로 묵묵히 걸어가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눈에 보기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병신도 문제도 마치 거대한 빙산같이 서서히 녹아 질 것입니다. 먼저 믿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사회와 교회 안에서 소금이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다면,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병신도들도 자연히 함께 동화되고 변화되어 참된 주의 제자로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은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살고, 바르게 가르치고, 꾸준히 전도하는 일이 문제를 푸는 당연하고도 유일한 해법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기도하고 노력을 한다면 이러한 삶은 교회 내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고 이웃에서도 구체적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그 동안의 외적 성장에 자만해 있던 개혁교회들이 다시 한번 스스로 각성하고 새롭게 변화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첨언하고 싶은 것은, 필자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이 '병신 도'란 이름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병신도란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건강을 잃으면 자연히 병이 들어 환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담고 자신을 부지런히 살피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병든 신도가 되어 교회와 사 회에 누를 끼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아픔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이유로 병신도를 깨우는 일은 남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자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병신도는 우리의 형제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병신도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며 자매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분들을 깨우고 도와서 참된 동역자로 세우고 진정한 예배, 선교, 구제, 교육, 그리고 지역 사회를 섬기는 일에 동참시키는 일은 개혁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무이며 소홀히 해선 안될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리고 비록 이 일이 어려울지라도, 너무 낙심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바알에게 무릅을 꿇지 않은 여러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우리 신자들의 가슴마다 심겨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과 하늘의 소망은 그 누구도 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렘5: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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